구천동계곡의 겨울..
오늘도 짬이 나니 당연히 산으로 간다.
취미생활이자 습관이고 중독증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나를 짝사랑하는 산이 나를 자꾸 불러들인다는
엉뚱한 변명도 해본다.
산을 사랑하는 산꾼이지만, 또한 평지 부적응 내지는
평지 불안증 환자일 수도 있다..
산이 좋으면 아무 산이나 가면 되는데
목적지를 선택할 때 경우의 수가 왜 그리도 많은지...
결론은 대둔산이나 가볍게 걷고 오려고 출발을 했는데
차창 밖의 희뿌연 미세먼지가 앞을 가로막았다.
이왕 나왔으니 그냥 갈까?!
이런 날씨에 헉헉대고 산에 올라봤자 오히려 독이 될텐데
아쉽지만 돌아갈까?!
인생은 늘 선택을 강요한다..
늘 선택에서 오래 숙고를 한다고
탁월한 결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시간만 손해를 볼 수도 있다.
짧은 순간에 생각나는 것은 만만한 덕유산...
리프트를 타고 오르면 헉헉댈 일이 없는데다가 요즘 눈도 많고,
오래 편하게 걸을 수 있기도 하니...
가까이에 덕유산이 있다는 것은 나에게 큰 축복이다.
겨우내 입었던 흰옷을 벗어던진 모든 산들은
따사로운 햇살을 충전하며 봄맞이를 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덕유산은 아직도 하얀 겨울잠을 자고 있었다.
미세먼지도 그다지 걱정할만큼은 아니어서
덕유산으로 방향을 튼 탁월한 선택에 기분 업..
편하게 설경을 맛보기만 하면 된다..
하얀 옷입고 깊은 생각에 잠긴 겨울산..
내가 좋아하는 먼산이 아스라히 보일 때에는
그곳에 대한 그리움에 마음이 젖게된다.
남덕유까지 덕유능선과 말갈기처럼 부드러운 지능들의 강약,
고저장단의 하모니가 아름답다..
중봉, 오수자굴을 거쳐 구천동 계곡으로 들어섰다.
겨우내 내린 눈이 켜켜히 쌓여 계류 가득하던 계곡을 감췄고
밝은 햇살이 내려앉으며 아름다운 동화 속의 겨울 왕국을
만들어 놓았다..
그 많던 칼러들마저 긴 겨울잠 속에 빠져들어
모노톤의 심플한 세상이 되었건만 오히려 단순, 절제미가
전해주는 아름다움은 담백하고 사랑스럽다..
눈이 깊게 쌓이고, 꽁꽁 얼었지만 그 속으로 물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생명들을 꼼짝 못하게 얼려버릴 듯 기세등등한
혹한이었지만 그 부드러운 물줄기가 가진 생명의 기운마저
얼리진 못하였다..
산에 나있는 길은 직선 보다 부드러운 곡선이다.
보일 듯 말 듯..끊어질 듯 이어지고..다 온 듯하면서도
끝없이 이어지는 길..그래서 지루하지 않은 발걸음을 이어준다..
밟을 때마다 들려오는 겨울의 서정시, 발라드노래들도 좋다..
눈이 밝음이라면 얼음은 어둠이다.
포근함과 앙칼짐, 부드러움과 단단함, 천국과 지옥,
눈이 녹아 얼음이 되고, 얼음이 녹아 물이 되는 순환이 담겨있다..
산에 들어온 순간부터
욕심을 버리고 마음이 비워져 이미 행복해져 있는데
또 무슨 소원을 원하랴...
소원을 비는 것을 보니 또 속세가 가까워진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