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목요일날
오전에 일을 잠깐 본 뒤 늦으감치 혼자 덕유산으로 향했다.
산행객은 별로 없으나 벌써 스키 타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곤도라를 타지않고 스키 슬로프로 걸어 오르려 하였으나
아래 부분의 인공설을 만드느라 뿌려대는 눈가루 사이를 뚫고 올라가기가 뭣해
곤도라를 타고 올랐다.
향적봉 오르는 길..
하얀 상고대 배경의 짙푸른 하늘이 눈이 시리고
바람은 후련하다 못해 뽈대기를 얼려 터트릴 기세다.
바다나 설산은 햇살의 농도에 따라
색감이 비례하여 맑고 흐려지는데
오늘은 눈에 들어오는 모든 세상이 부시도록 맑다.
인적없는 하얀 산 속에 홀로 있쟈니
내 마음 속도 새하얗게 화이트 아웃이다.
동등한 높이의 덕유 능선과 멀리 지리산이
더없이 친근하고 빛나게 보인다.
대피소 앞 야외 의자에 앉아 햇살을 쬐며 커피를 타서 마신다.
달착지근한 커피의 맛과 향 뿐만 아니라
새하얀 설향과 짙푸른 하늘의 향기도 마신다..
문득 햇살 듬뿍한 백련사 툇마루가 생각이 나고
늦점심 먹기에 안성맞춤이라 생각이 나서
눈이 쌓여 곱지 않은 길을 아이젠을 차고 타박타박 걸어 내려 갔다.
중간중간 땀을 흘리고 헉헉거리며 오르고 있는 사람들을 보자니
다시 올라올 것을 생각하고 계속 내려가는 것도 부담스럽기는 하다..
쉬고 싶은 생각이 날 즈음 도착한 백련사..
추녀 끝의 풍경을 휘이 건드리고
산으로 올라가는 바람 소리만 있을 뿐..
빈 툇마루는 정적을 더한다..
툇마루를 혼자 다 차지하고
컵라면을 게 눈 감추듯 후루룩 거리며 들이키고는
커피와 귤로 느끼함을 씻는다.
시장한 길손을 위해서인지 스님들의 출입도, 독경 소리도 적막강산...
오후 4시 반이면 곤도라가 끝나니 지체할 시간이 널널하지는 않다..
향적봉을 향해 다시 오른다..
오른다는 것은 집으로 편안히 돌아가는 길이다.
늦어가는 시간이라 오르는 사람도, 내려오는 사람도 없다.
혼자라는 느낌으로 적적해질 때면
찬 바람이 일깨워주고,
혼자하는 산행에는 걸음과 쉼에도 내맘대로의 자유가 있지만
걸음에는 욕심을, 쉼에는 인색해지니
발과 다리에는 부당한 착취와 부자유가 있는 것인가?!?
백련사로 내려갈 때에는
올라갈 것에 대한 일말의 답답함이 있었으나
올라갈 때에는
아까 이렇게나 많이 내려갔었나 하는 의문이 생긴다.
시간이 흐르고, 높이 올라갈수록
자꾸 산그림자가 길어지고 깊어지며
바람에는 한기가 더 짙어진다.
얼마쯤 헉헉거렸을까..
드디어 하늘이 넓어지고 시야가 넓어진다.
내려갈 때에는 햇살이 머리 위에서 비쳤으나
올라오니 햇살이 산의 옆구리를 파고든다.
랜턴을 가져왔다면 석양과 일몰을 보고
스키슬로프로 걸어 내려갈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다.
집을 나온 메마르고 건조한 차가운 바람도 제법 추운지
장갑 속, 목, 얼굴, 겨드랑이, 바짓가랭이 속, 양말 속 까지 파고 들어온다..
나는 왜 막걸리 한 잔 하자는 친구들이 있는 번잡한 속세를 떠나
가끔은 외톨이가 되려고 하고 또 그것을 즐기려 하는가??
나도 모르는 나의 이중성이다..
곤도라를 타고 내려오니
설천봉 정상 부위에만 햇살 한 줌이 남아 있었고
산을 올라오느라 젖었던 몸이
곤도라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 냉동 인간이 되는 듯하다.
리조트 내의 싸우나에 들어가 몸을 녹인다..
향적봉의 찬바람이 녹고,
하얀 겨울이 녹아내리고,
하루 내내 누렸던 자유가 녹고 있었다..